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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통의식의 관점에서 본 공간배치
이름 채대수
등록일 2013-06-10 20:11:51
조회수 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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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식의 관점에서 본 공간배치
 
    현재 남아 있는 한옥의 대부분은 17세기 전후에 세워졌으며 목조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다. 4, 5백년이 되었다는 집도 있으나 이는 입향조(入鄕祖)가 최초로 집을 세운 시기를 이르는 말이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은 두말 할 것이 없다.
그런데, 17세기는 조선조의 후반기로서 유교적인 가르침이 우리네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따라서 유교의 덕목을 익히고 이를 실천하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여겼던 상류층 사람들이 집을 지음에 있어 유교적인 틀에 맞추려고 노력하였던 점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집을 한 가족의 주거공간으로서 보다는 유교적인 도덕률을 가르치고 실행하며 이를 과 시하는 하나의 도장(道場)으로 여겼던 것이다. 부부는 준 별거상태에서 각기 생활 하였으며 죽은 조상을 받드는 일에 지나치게 얽매였고 살아 있는 부모를 섬기는 일도 매우 까다로워서 아랫사람은 기를 펴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남자 어린이 는 서너 살 때부터 안채 어머니 품에서 떠나, 사랑채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아야 하였으므로, 따뜻한 애정보다는 엄격한 규율의 그물 안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 다. 그리고 여성의 가정생활도 숨이 막힐 듯 한 괴로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상류가옥의 평면 구성이나 배치가 부부의 애정을 북돋우고 가족이 단란을 누리며 서로 화합하여 즐겁고 화평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가기보다 가부장 의 권위를 내세우고 그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기에 알맞도록 이루어진 것도 유교 적인 윤리관 때문이다.
 
    다음에 유교의 대표적 덕목이라고 할 조상숭배, 남녀유별, 장유유서의 관념과 상하 계층의식 따위가 우리네 상류가옥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생활상이 어 떠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조상숭배의 생활
 
    효는 유교사상 가운데 최고지선(最高至善)의 개념이었다. 자손은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는 물론, 그들이 죽은 뒤에도 효도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었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 공존해왔음에도 상속의 경우 중국에서는 실질적인 재산권을, 그 리고 일본에서는 상징적 가장권인 호주의 지위계승을 상속의 제일 요건으로 삼았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받드는 권한을 이어 받는 것이 중요 내용이었다. 또 중국에서는 아들, 딸의 구별 없이 부모의 재산을 자손들이 공평하게 나누며 일본에서는 부모가 특정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거나 자손 가운데 적격자가 없을 때에는 데릴사위를 맞아서 넘겨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큰아들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넘겨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장차 부모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당의 중앙 문으로는 종손만 드나들고 그 외 자손은 좌우의 옆문을 이용하도록 해서 제사를 받드는 종손의 권위를 한층 높여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네 조상숭배 관념 특히 죽은 부모를 위한 제사에 대한 관념이 어느 정도로 뿌리깊었던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조상숭배 관념은 조상의 위패를 모셔 두는 사당에 구체적으로 표현되 었다. 상류가옥에 사당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인 14세기 중엽부터이다. 조선조에서는 건국초기부터 이의 건립을 강력히 권장하였으며, 사당이 없다는 이유로 귀족에게 벌을 내리고 출가한 승려조차 유교적 상례(喪禮)를 치르도록 강권하였다. 시대가 지나면서 사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 가 없다.
집을 지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사당 터를 잡았으며 다른 건물보다 높이(또는 높은 자리에) 세우고 한 번 세운 사당은 헐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따라 서, 사당이 있는 집은 종손이 대를 이어 살게 마련이었다. 풍수설에서 말하는 이 른 바 명혈(名穴)도 사당 터에 뭉쳐 있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당은 집안 의 중심처가 되는 동시에 모든 복의 근원지이기도 하였다.
 
    집의 좌향이 남향이거나 또는 이에 준하는 좌향인 경우, 사당은 동북쪽에 두 는 것이 원칙이며 이에 따라 사랑채는 동남쪽에 배치된다. 사당이 동북쪽에 있음에도 사랑채를 서남쪽에 세우는 일은 매우 드물며 부득이하여 사당을 서북쪽에 지으면 사랑채도 서남에 세운다. 사당과 사랑채는 그 집안에서는 같은 방향에 세워지며거리상으로도 최단거리에 둔다.
 
    사당을 동북쪽에 세우고 사랑채를 이에 가깝게 두는 것은 동북쪽이 해가 뜨는 양(陽)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생명을 상징하고 부활을 의미하며 생명력을 키워주는 존재로 믿어진다. 또 동북방향이라야 해가 일찍 비치고 언제나 밝은 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조상의 혼백을 모시는 사당을 이러한 곳에 두는 것은 당 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당과 사랑을 가깝게 두는 것은 사당의 실질적인 관리자가 사랑채에 기거하 는 남자들일뿐더러 남자들의 거주처인 사랑채를 역시 양(陽)의 방향에 두려는 배려의 결과이다. 이것은 한 집을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으로 분할하는 원칙과도 관계가 깊다.
    사당은 단간으로 세우기도 하나 3간의 건물이 대부분이며 주위에는 따로 담을 두르고 문을 붙여 출입문으로 삼는다. 사당의 규모나 치레도 대단하였지만 사당 에 대한 마음 또한 경건하여 사당 안에 조상이 살아 계신 듯이 대하였다. 집에 따라서는 매일 아침 주인이 사당에 나아가 인사를 올렸으며 이때 음식을 마련하는 일도 있었다. 또 명절은 물론 초하루나 보름에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받들었고 천신례(薦新禮)라 하여 계절에 따라 새로 나는 과일이나 곡식 따위를 사당에 먼저 올렸다. 주인이나 주부가 외출할 경우, 나가기 전과 돌아온 다음에 반드시 사당에 나 아가 알렸으며 중요한 가정사는 대부분 사당 앞에서 행하였다. 또 혼인할 때에 도 먼저 사당에 알려서 승인을 얻었고 가정의 비일상적인 일 예컨대 해산, 취직, 군 입대 등도 사당에 나아가 고하였다.
 
    사당이나 벽감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조상 당세기를 마련하지 않은 집에서는 3년동안 조상의 혼을 모시는 궤연(?筵)을 차려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며 음식을 바친다. 궤연 안에는 죽은 이의 사진을 세워두며 장례 때 입었던 상복 상자도함께 둔다. 이를 상청(喪廳)이라고 하는데 근래에는 1년 동안만 두는 집이 많다.
사당에는 4대 선조까지의 위패를 왼편에서부터 나란히 모시며 대가 지나면 맨윗대의 위패를 그의 무덤 앞에 묻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어떤 집에서는 이들의위패 외에 불천위(不遷位)이라 하여 다른 하나를 왼쪽에 별도로 모시는 일이 있다.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로를 끼친 인물에 대해서 그가 영원히 제사를 받도록 하려 고 국가에서 지정한 인물의 위패로서 이를 국천(國遷)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불천위는 지방의 서원에서도 추천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이를 도천(道遷)이라 하였다. 국천과 도천 사이에 영예상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한편, 나라의 기강이 허술해지면서 국천이나 도천에 끼지 못한 가문에서는 자기들끼리 스스로 정한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사당을 따로 세우지 못하는 집에서는 집안의 어느 한 공간 을 사당으로 정하고 이곳에 위패를 모셨다. 이 공간은 주로 대청이나 마루에 꾸미는 것이 보통이다. 바닥이 마루인 경우에는 사당청(祠堂廳), 방에 꾸몄을 때에는 사당방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공간은 주로 중류가옥에 마련된다.
 
    사당방이나 사당청조차따로 두기 어려운 경우에는 사당벽장 이라 하여 대청 뒷벽 상부에 붙인 작은 장에 위패를 두는데 이것이 벽감(壁龕)이다. 위패를 갈무리하는 감실(龕室)은 흔히 궤짝처럼 짜지만조각을 붙이거나 집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편, 서민가옥에서는 조상 당세기 또는 몸오가리라 하여 쌀을 담은 작은단지를 안방 시렁 위에 모신다. 이 단지는 주로 장손 집에 두며 위패처럼 조상 수 대로 마련하거나 1대에 1개씩 모두 4개를 놓기도 한다.  상류가옥에서는 조상을 받들기 위한 공간으로 사당 외에 여막방(廬幕房)이라 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이 방은 육친이 사망했을 때 시신이 담긴 관을 서너달 동안 모셔두는 공간으로, 후손들은 평시와 다름없이 조석상식(朝夕常食)을 차리며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관례였다.
 
 
 
2) 남녀유별의 생활
 
    남녀유별의 유훈(儒訓)은 유교의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우리네 상류가옥 건물 배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부일지라도 남녀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였으며이를 위해서 한 집은 사랑채를 중심한 남자의 공간과 안채를 중심한 여성의 공간으로 분할되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담을 치고 문을 달았으며 이 문이 닫히면두 세계는 완전히 차단되었던 것이다.
 
    남향집으로서 대지가 동서보다 남북이 긴 장방형인 경우, 사랑채는 동남쪽에, 사당채는 동북쪽에 그리고 안채는 서북쪽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이 와 대조적으로 대지의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으면 사랑채와 행랑채는 전면 오른쪽(동쪽)에, 안채는 왼쪽(서편) 뒤(북쪽)에 둔다. ㅁ자형 평면인 경우 남향집의 사랑채는 동남쪽에, 사당채는 동북쪽에 그리고 안채는 서북쪽에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다.또 규모가 큰 가옥에서 ㅁ자의 마지막 획의 해당하는 부분(집의 전면)에 사랑채를세워서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막기도 한다. 사당처럼 남성의 주거공간을 (해가 뜨는)동쪽에 두려는 배려 때문이다. 동과 서를 좌우의 개념으로 대치시키면 동은 오른쪽이고 서는 왼쪽이 된다. 그런데 오른쪽은 남성, 정의, 선, 밝음, 길조, 생명을상징하고 왼쪽은 여성, 불의, 악, 어둠, 불길, 죽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믿는 풍습에 기인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여성은 안채에서, 남성은 사랑채에서 각기 생활하였으며 비록 부부일지라도 내외가 함께 있는 경우를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는일은 거의 없었다. 안채에서 마련한 매끼의 음식은 아랫사람들이 사랑채로 운반하였고 의복 또한 안에서 내다가입었다. 상류가정 부인은 자기의 거주 공간인 안채 중문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이러한 부인들은 사내아이를 낳은 뒤 이른바 근친(覲親)을가거나 부모의 상례를 치르려고 친정에 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나들이였다. 따라서 그네들이 자기집 대문을 나서는 일은 일생을 통해서 서너 번에지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녀가 이처럼 제각기 생활하는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이 이들의 성생활이다. 더구나 조선조 사회에서는 여성이 남의 집에 시집을 가서 사내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여겼으며 만일 사내아이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관습에 따라 시집에서 쫓겨나는 일을 불문율로 삼던 시대였다. 그런데, 남녀가 이렇게 떨어져 생활하였으니 언제 어느 사이에 임신이 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하려고 젊은 주인이 그의 아내 방에 드나들기 위한 비밀통로를 따로 마련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같은 비밀통로를 통해서 남편은 깊은 밤중에 아내의 방에 들어갔다가 이른 새벽에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아무도 남편이 아내의 방에 함께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아서도 아니 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일정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사랑채 아버지가 아들의 아내방 출입을 통제하였다. 부부 합방(合房)에는 좋은 날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청소년기의 아들이 성적인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부부간의 생활이 이러하였던 만큼 외간 남자의 안채 접근이 철저하게 봉쇄되 었던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주인의 허락 없이 안마당에 들어선 사람은 내정돌입(內庭突入)이라 하여 법에 의존하지 않고 사형(私刑)을 가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집을 팔고 사는 경우에도 안채에는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처럼 외부사람의 안채 출입을 엄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선이 안채에 이르는 것을 막으려고내외벽이나 내외담을 치기까지 하였다. 내외벽은 중문이 열렸을 경우 마당에서 안채의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으려고 중문간의 안채 쪽에 세운 벽이다. 이렇게하면 출입자가 옆으로 돌아들거나 돌아 나와야 하고 더구나 중문간 한 간을 통로로밖에 쓸 수 없지만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 이러한 불편과 손실을 감수하였던 것이다. 내외벽은 흔히 널벽으로 세우지만 화초담을 쳐서 치장을 겸하는 수도 있다.

 
3) 장유유서의 생활
 
    어른과 어린 사람 사이에 차례가 있다는, 이른바 장유유서의 관념도 우리나 라 상류가옥 공간배치나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사랑채의 경우,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을 큰 사랑방, 아들이 쓰는 방을 작은사 랑방이라 부르며 안채에서도 시어머니 방을 안방이라 하였다. 따라서 방의 이름 통해서도 우리는 공간의 성격이나 비중 또는 규모까지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큰 사랑방은 2간 규모의 것이 대부분이나 작은 사랑방은 단간짜리가 보통이다. 또 큰 사랑방은 햇볕이 잘 들고 대청을 끼고 있어서 어느 계절에나 쾌적한 분위기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다락과 골방이 딸리며 벽장까지도 시설되고 큰사랑방 주인의 심부름을 도맡은 어린 소년이 기거하는 작은 방을 따로 붙이기도 한다. 따라서 방 자체의 규모는 작은 사랑방에 비해 배에 지나지 않으나 사랑채 자체는 실상 큰사랑방 주인의 독차지요 젊은 주인의 방은 큰 사랑방 뒷편에 배치되게 마련이어서 남향집의 경우 오후가 되어야 햇볕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젊은 주인은 큰 사랑방의 부친을 정중하게 받들어 모시기 위해 사랑채의 한 방에서 기거하는 셈이다. 방의 규모나 위치 뿐만 아니라 세간이나 꾸밈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큰 사랑방에는 값진 문방구와 호사스런 가구 따위를 갖추게 마련이나 젊은 주인의 방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격차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규모에 있어 시어머니 방이 며느리 방의 배가 되는것이 보통이며 다락과 벽장 그리고 흔히는 찬방까지 딸린다. 부엌과 대청마저 이 방에 딸리고 안채의 고방이나 도장, 곳간의 열쇠까지 안방 주인이 쥐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안채도 역시 시어머니 차지임이 분명하다. 이에 비해 건넌방은 규모가 단간에 지나지 않으며 전면에 짧은 퇴가 딸리거나 좁은 누마루를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다.
 
    특히, 경상도의 상류가옥에서는 시어머니 방과 며느리 방의 차이가 매우 뚜렷 하다. 며느리 방이 시어머니 방의 반인 것은 그렇다고 하거니와 장판이 없이 흙바닥에 자리를 깔았을 뿐이고 천장에도 반자 시설을 하지 않아 서까래의 뱃바닥 이 그대로 드러나는 집이 적지 않다. 이외에 방의 위치나 이에 따른 좌향에 따라 채광이나 채온이 불리한 점은 더말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어떤 집에서는 대청으로 드나드는 문에도 차이를 두어서 안방에는 쌍여닫이를 붙였음에도 건넌방 문은 외여닫이를 달았다. 또 안방에서는 찬방 외에 골방을 붙여서 옷이나 이부자리를 두고 필요에 따라 안잠자리를 재우기도 하지만 건넌방에는 이러한 여유가 없다. 따라서 사랑채 젊은 주인이 사랑채의 한 구석방에 몸을 담고 있듯이 안채에서도 며느리는 안채에 딸린 한 작은 방에서 숨소리조차 죽이고 기거하는 셈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나타나는 공간분할의 격차는 상류가옥뿐만 아니라 3간 내지 4간 초가의 경우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장유유서 관념은 부모대와 아들대 뿐만 아니라 맏아들과 그 다음 아들들 사이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맏아들이 대를 잇게 하고 그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시키는 이른바 장자우대 상속제도이다. 앞에서 말 한 대로 사당도 장손은 중앙의 출입문으로 드나드는데 반해 나머지 사람은 좌우의 옆문을 쓰며 맏며느리만은 큰방에서 해산하도록 하는 지역도 있는데 이는 맏며느리가 대를 이을 맏손자를 낳는다는 기대 때문이다.
 
    중류가옥에서 부모가 안방을 맏아들에게 내어주고 사랑으로 물러났다 가도 아 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 방을 둘째 아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사랑채에 다시 들어와 차지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둘째 아들은 그의 형이나 부모와 한 집 살림을 하는 경우에는 안방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집에 따라서는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에서 물려주며 새집으 로 이사할 때에도 맏아들이 불씨가 담긴 화로를 먼저 들고 들어가게 한다. 또 대를이어 내려오는 그 집의 음식을 만드는 법이나 술을 빚는 비법 따위도 시어머니는 반드시 맏며느리에게만 일러주었던 것이다.


4) 상하 계층의식
 
    조선조 상류 가정에는 여러 명의 노비들이 매여 있었다. 이들은 매매의 대상 이 되기도 하고 대를 이어 물려도 주었으며 시집오는 새댁은 몸종을 데리고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은 이처럼 신분이 낮았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예외의 상태에 있었다. 이른바 양반계층에서는 남녀 유별의 관습을 그처럼 엄격하게 지켰으면서도 이들은 내외법을 지킬 자격조차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식사 때에도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부엌에 모여들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음식을 들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류층 가옥의 부엌면적이 매우 너른 것은 이곳이 노비들의 식사처이기도 하였던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잡역을 담당하였으나 그 내용은 집에 따라 달랐다. 이들은 혼인 하기 전에는 바깥행랑방이나 안행랑방에서 기거하지만 혼인 뒤에는 주인 집 위에 세운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집에서 잠을 잘 뿐이며 날이 새면 주인집에 들어가 일을 하고 거기서 세 끼를 먹었으며 어두워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집들을 주인집 주위에 세우는 것은 일이 있을 때 마당에서 부르기 좋고감시하기 에도 편리하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이점 외에 주인집을 보호케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나 노비의 집은 대문 좌우 쪽이나 후미진 뒷담 밖에 세우게 마련이어서 좌향을 고려할 여지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집들 가운데 북향집이 적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상류가옥에는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전용의 바깥뒷간이 있게 마련이나 일부의 집에서는 사랑채 가까운 곳에 주인 전용 뒷간과 행랑채 끝에 아랫사람 전용의 뒷간을 따로 두었으며 바깥 뒷간은 물론 안뒷간마저 설치하여 위아래 사람이 따로 쓰도록 하였고 이 밖에도 상류가옥에는 바깥 뒷간을 두 곳에 마련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류가옥에는 비교적 많은 사람이 기거하였으므로 뒷간을 더 갖추어 둘 필요 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에서 요강을 사용하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3~4군데의 뒷간이 반드시 필요성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편, 아랫사람들이 쓰던 행랑방의 규모가 단간이고 흙바닥에 자리를 깔았을 뿐이며 천장에는 반자시설을 하지 않고 방문도 주인네의 것은 겹문 내지 삼겹문 이었음에도 이들의 것은 홑문에 지나지 않은 점 따위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오히려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상류가옥에서 안채나 사랑채를 지나치게 높이 세웠던 것도 상하계층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더 높이 세워서 축대의 높이는 1m가 넘으며 어떤 집에서는 축대를 겹으로 쌓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면 집이 우뚝 솟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아랫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목적이 숨어 있는 것 이다. 이러한 집의 마루나 방은 다락처럼 높아서 아랫사람이 마당에 섰을 때라도 앉은 주인은 머리꼭대기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 마련이다.
 
    상하계층 의식은 양반과 양민 또는 양반과 천민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양반과 양반 사이에도 가문이나 출신, 벼슬의 높낮이 또는 나이에 따라 엄격히반영되었다.  상류가옥의 안방이나 사랑방이 2간인 경우, 통간(通間)으로도 쓰지만 흔히 장지로 간을 막는다. 이렇게 하면 겨울철 난방에도 유리할 뿐 아니라 위간에 몸종이나 딸 또는 손녀를 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방이나 사랑방의 장지문을 떼거나 들어올렸을 때에도 그 문턱은 신 분상의 경계선 구실을 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경계선으로하여 주인이 자리잡고 앉은 아랫간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윗간에서 대화를 나누며 이보다 더 못한 사람은 윗간에 앉지도 못하고 두 손을 맞잡고 선 채로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따라서 한 방 안에서라도 주인이 손님을 위아래 어느 간에 두고상대하는가에 따라 그에 대한 주변 사람의 예우가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또 한방에서도 아랫사람은 주인과 마주 앉지 못하고 반드시 모로 꺾어 앉는 것이 예의였다.
 
 
5) 안살림 ? 바깥살림
 
    우리네는 안살림은 주부가, 바깥살림은 가장이 맡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으 며 상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것은 여성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가 따로 세워지는 것은 물론, 이 사이에 담을 쳐서 두 세계를분할한 것만큼이나 분명하였다. 남편이 아내를 <안사람>이라 하고 아내가 남편을 <바깥양반>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경우 5~6살이 되어 일단 안채의 어머니 품 에서 벗어나 사랑채로 나가면 이때부터 그에 관한 교육은 오로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좌우하게 마련이었다. 이에 비해 딸은 혼인할 때까지 안채에서 기거하므로 그네에 관한 모든 교육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안살림권을 상징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열쇠 꾸러미이다. 살림을 맡은 주부는 곡식이나 찬 따위를 갈무리하는 곳간이나 도장의 열쇠가 달린 열쇠 패를 치마끈에 차고 지내며 밥 지을 쌀을 꺼낼 때에도 반드시 직접 문을 열고 쌀을 떠내준 다음 스스로 잠그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살림권을 물려줄 때에는 이 열쇠 패를 끌러서 며느리에게 주었다.
 
    한편, 바깥살림은 중요문서(주로 땅이나 산 문서)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넘겨 받는 것으로 세대교체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재산권의 행사는 아들이 주 관하게 되는 것이다. 안살림에 있어서나 바깥살림에 있어서나 이처럼 경제적인 결정권이 살림살이의 핵심을 이루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고 하겠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안살림권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깥살림권을 넘겨주 는 관행이나 그 시기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살림권의 이와 같은 이양은 안팎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기보다 안채에서 먼저 이행되고 바깥채에서는 보다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관행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표방했던 사회였던 만큼 아마도 바깥 살림의 중요 부분이라고 할 손님접대를 비롯하여집안이나 가문을 대표함에 있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적합하리라고 여겨졌던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1. 韓國의 住居民俗誌, 민음사(1989년) 김광소 저
2. 생활과 조경, 문음사(2000년) 신수철 외 3인
3. 학원세계대백과사전, 학원출판공사(1994년)
4. 한국의 옛집, 마당(1982년) 김광소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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